
숫자보다 먼저 ‘철학’을 말하는 드문 CEO
팔란티어(Palantir)의 분기·연간 실적 발표가 다가오면, 투자자 커뮤니티에서 먼저 회자되는 것은 실적표보다 알렉스 카프(Alex Karp) CEO의 주주서한이다.
보통 테크 기업의 주주서한은 성장률·마진·제품 로드맵이 중심이지만, 카프의 글은 다르다.
그의 서한은 서방 민주주의, 안보, 소프트웨어의 권력 같은 주제를 다루는, 일종의 철학적 에세이에 가깝다. 실제로 여러 매체가 그의 주주서한을 “주권, 책임, 기술 유토피아에 대한 회의”를 다루는 독특한 텍스트로 평가한다.
이 글에서는 그 문장들 뒤에 숨겨진 전략적 메시지를 해석해본다.
✒ 1. 주주서한의 문체: IR 문서가 아니라 ‘정치·철학 에세이’
팔란티어의 주주서한은 길고, 비유가 많고, 때로는 공격적이다.
- 실리콘밸리의 다른 빅테크들을 겨냥해
- “엔지니어 엘리트들은 소프트웨어를 더 잘 만들지 몰라도, 사회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 정의가 무엇인지 더 잘 아는 것은 아니다”
라고 비판한 문장은 2020년 상장 신고서(S-1)에 실린 그의 대표적인 발언이다.
- “엔지니어 엘리트들은 소프트웨어를 더 잘 만들지 몰라도, 사회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 정의가 무엇인지 더 잘 아는 것은 아니다”
- 그는 반복적으로 “우리는 실리콘밸리의 주류 가치와는 점점 거리를 두고 있다”고 쓰며, 팔란티어가 일반적인 광고·소셜 플랫폼이 아니라 국가 안보 인프라 기업이라는 점을 강조해왔다.
즉, 카프의 주주서한은 단순히 “올해 성과 → 내년 가이던스”의 구성이 아니라,
팔란티어가 어떤 세계관을 가진 회사인지, 어떤 가치를 위해 논란을 감수하는지를 주주에게 선명하게 각인시키는 장치다.
이건 결과적으로, 팔란티어 주식을 “일반 성장주가 아니라, 특정한 정치·철학적 미션에 동의하는 주식”으로 포지셔닝하는 효과를 낸다.
🛡 2. “서방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소프트웨어”라는 프레이밍
최근 몇 년간 주주서한에서 반복되는 핵심 키워드는 “서방(The West)”와 “민주주의”다.
- 카프는 여러 서한과 인터뷰에서 팔란티어를
“서방의 안보와 주권을 지키는 데 필수적인 소프트웨어 회사”로 묘사한다. - 2022년 주주서한에서는
“미국과 동맹국의 대형 기관 대부분이, 전체 운영 또는 운영의 상당 부분을 팔란티어 위에서 돌리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적시했다는 인용이 공개된 바 있다.
이 메시지는 몇 가지 전략적 효과를 가진다.
- 국방·정보기관 고객에게
→ “당신들이 하는 일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이며, 우리는 그 임무를 기술로 뒷받침한다”는 정당성 제공 - 투자자에게
→ 단기적인 경기 변동과 별개로, 서방 안보 지출은 구조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메가 트렌드’에 올라탄 기업이라는 인식 제공 - 윤리 논란에 대한 방어선
→ 감시·프라이버시 논쟁이 있을수록 “우리는 전체주의를 돕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진영을 보호한다”는 서사를 강화한다.
즉, 주주서한은 팔란티어를 단순한 데이터 플랫폼이 아니라
“민주주의 진영의 디지털 방위산업체”로 포지셔닝하는 핵심 수단이다.
📉 3. 단기 주가보다 ‘장기 파트너십·제품 우위’에 초점을 맞추는 메시지
카프의 주주서한은 자주 단기 주가 변동을 거의 신경 쓰지 않는 톤을 취한다.
- 그는 여러 차례 “우리는 단기 투자자의 기대에 맞춰 회사를 운영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남겼고,
- “주가보다 중요한 것은 고객이 실제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해왔다.
또한 최근 인터뷰와 서한에서는,
“미국 상업·정부 시장에서 실질적인 경쟁자가 없다고 본다”
라는 발언까지 내놓으며,
팔란티어의 소프트웨어가 경쟁사와 단순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카테고리 자체를 바꾸고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주주서한에 이런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포함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 주가 변동성에 대한 선제 대응
- 방산·정부 비즈니스 특성상 계약 공시 시점에 따라 실적이 요동칠 수밖에 없고,
- 이를 “장기적인 미션과 구조적 성장” 이야기로 상쇄하려는 의도다.
- ‘장기 동행할 주주’를 골라내기
- 철학적인 문장과 논쟁적 표현은,
- 단기 차익만 노리는 투자자보다는 회사의 미션과 세계관에 동의하는 장기 주주를 필터링하는 기능을 한다.
🧠 4. 철학·정치·전쟁까지: 서한이 다루는 주제의 확장
카프의 서한은 전통적인 재무·전략 이슈뿐 아니라, 점점 더 지정학·전쟁·AI 규제 같은 거시적 이슈를 포괄한다.
- 2025년 이후 서한과 인터뷰에서 그는
“AI 경쟁에서 미국과 동맹국이 뒤처지지 않으려면 상당한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며, 서방 우위 유지를 위한 공격적 AI 투자를 정당화한다. - 동시에, 일부 AI 투자는 “가치보다 비용이 더 클 수 있다”는 경고도 내놓으면서,
단순 AI 버블에 올라탄 회사가 아니라 ROI 중심의 실용주의적 AI 기업임을 강조한다.
이처럼 주주서한은 다음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 팔란티어의 제품·매출을 지정학적 맥락 속에 위치시키는 작업
- 방산·AI 거버넌스 논쟁에 대한 회사의 공식 입장을 기록하는 공간
- 동시에, CEO 개인의 정치·철학적 관점을 시장에 주입하는 채널
📌 5. 주주서한이 드러내는 ‘숨은 전략’ 정리
정리하면, 카프의 주주서한은 단순한 투자자 커뮤니케이션을 넘어 전략 문서에 가깝다.
- 포지셔닝 전략
- “우리는 광고·검색 회사가 아니라, 민주주의 진영의 디지털 방산·운영 플랫폼이다.”
- 투자자 기반 관리 전략
- “단기 주가에 민감한 투자자보다는, 우리의 미션과 세계관에 동의하는 장기 주주를 원한다.”
- 규제·윤리 프레이밍
- “감시 논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체주의가 아니라 서방 민주주의를 위한 소프트웨어를 만든다.”
- 경쟁 구도 정의
- “우리는 단순히 다른 SaaS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방의 국방·정부·핵심 인프라의 디폴트 OS가 되려 한다.”
주주서한을 이렇게 읽고 나면,
팔란티어 주식은 단순히 “AI·데이터 플랫폼 성장주”가 아니라,
“특정한 정치·철학적 미션을 띤, 안보·AI 인프라 기업에 대한 장기 베팅”
이라는 사실이 훨씬 선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