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여행을 떠나기 전, 저는 솔직히 포트 와인만 떠올렸습니다. 달콤하고 묵직한 디저트 와인으로 유명하니까요. 그런데 현지에 도착해서 식당에 앉아 “뭐가 현지인들이 즐겨 마시는 술이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뜻밖에도 비뉴 베르데(Vinho Verde), 그러니까 그린 와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와인 색깔이 초록색일까?” 하고 단순하게 상상했어요. 하지만 실제로 마셔보니 전혀 다른 의미였죠. 포르투갈어에서 ‘Verde’는 ‘초록’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리다, 신선하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즉, 그린 와인은 아직 젊고 신선한 상태에서 병입하는 와인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었습니다.
🌿 그린 와인이 특별한 이유
그린 와인은 주로 포르투갈 북부, 미뉴(Minho) 지방에서 생산됩니다. 이 지역은 습하고 온화한 기후 덕분에 포도밭이 무성하게 뻗어 있는데, 포도나무가 담장이나 나무 위로 뻗어 올라가며 자라는 독특한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와인은 숙성 과정을 거쳐 무게감을 더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린 와인은 오히려 젊음과 신선함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오래 묵히지 않고 빠르게 병입하여 상큼한 향과 산미를 그대로 즐기도록 만든다고 해요.
맛은 어떨까요?
첫 모금에는 가볍고 청량한 기운이 확 들어옵니다.
산뜻한 산미가 입안에 퍼지면서 레몬, 라임 같은 시트러스 향이 느껴집니다.
끝에는 은근히 미세한 탄산감이 더해져 청량한 뒷맛을 남깁니다.
저는 처음 마셨을 때 와인이라기보다는 레모네이드와 와인의 중간쯤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와인을 잘 모르는 사람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고, 맥주나 칵테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여행 속에서 만난 그린 와인
포르투갈 여행 초반에는 당연히 “포트 와인”을 마셔야 한다고 생각했죠. 다들 포르투갈 대표 와인이 포트라고 하니까요. 그런데 현지인들에게 추천을 물어보면 하나같이 “그린 와인 꼭 마셔봐!”라고 했습니다. 덕분에 저녁마다 자연스럽게 자리를 차지한 건 포트 와인이 아니라 늘 그린 와인이었어요.
제가 처음 그린 와인을 접한 건 리스본의 작은 로컬 식당이었습니다. 메뉴판에 ‘Vinho Verde’라고 적힌 걸 보고 호기심에 주문했죠.
잠시 후 종업원이 가져온 잔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와인잔이 아니라 큰 물잔 같은 것이었습니다. 순간 조금 당황했지만, 한 모금 마시자 바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아, 이건 진짜 가볍게 마시는 와인이구나.”
사실 그린 와인은 그렇게 특별한 ‘큰 자리’를 차지하는 술이 아니에요. 오히려 포르투갈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느낌? 동네 사람들이 퇴근 후 맥주 한 캔 열듯이, 혹은 점심에 가볍게 곁들이는 그런 술이었어요. 그 가벼움과 여유가 여행 내내 저를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 음식과의 환상적인 궁합
그린 와인은 음식과 정말 잘 어울립니다. 특히 해산물과의 궁합은 말할 것도 없어요.
- 구운 정어리(Sardinha assada): 포르투갈 여름철 대표 요리인데, 기름진 정어리의 맛을 깔끔하게 잡아줍니다.
- 문어요리(Polvo à lagareiro): 올리브 오일에 구운 문어와 상큼한 와인의 조합은 절대 실패할 수 없는 맛.
- 조개탕(Amêijoas à Bulhão Pato): 마늘, 고수, 올리브 오일로 맛을 낸 국물과 와인의 산미가 만나면 감칠맛 폭발.
- 가벼운 치즈와 샐러드: 와인의 청량함이 재료 본연의 맛을 더 돋보이게 합니다.
한 번은 포르투에서 유명한 ‘프란세지냐(Francesinha)’라는 빵+스테이크+치즈+소스 폭탄 음식과도 마셔봤는데요, 의외로 나쁘지 않았습니다. 무거운 요리를 와인이 산뜻하게 씻어주니까 “헤비한 음식에도 괜찮네?” 싶더군요.
🛒 가격과 접근성
그린 와인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바로 가성비입니다.
포르투갈 마트에 가면 4~6유로 정도면 충분히 훌륭한 한 병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현지인들은 마치 맥주처럼 툭 열어서 밥상에 올리곤 합니다. 관광지 레스토랑에서 주문해도 가격이 부담스럽지 않아, 여행자 입장에서도 가볍게 즐기기에 좋습니다.
특히 포르투갈 북부의 와이너리를 직접 방문하면 와이너리 투어와 시음을 함께 즐길 수 있습니다. 짧은 코스로도 투어를 신청할 수 있는데, 직접 포도밭을 걸으며 신선한 와인을 한 잔 마실 때 느껴지는 상쾌함은 정말 특별합니다.
✨ 그린 와인이 남긴 기억
포르투갈에서 돌아와 가장 자주 떠오르는 순간 중 하나는,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를 걷다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 시원한 그린 와인을 한 잔 마셨던 그 장면이에요. 사실 여행지에서는 하루에 몇 만 보씩 걷는 게 기본이잖아요. 발은 퉁퉁 붓고, 어깨는 무겁고, 머릿속은 이미 “오늘 저녁 뭐 먹지?”로 가득 차 있을 때쯤, 차갑게 식혀 나온 그린 와인 잔이 딱 눈앞에 놓이면… 그냥 그 순간이 천국 같았습니다.
와인이라면 뭔가 고급스럽고 진지하게 즐겨야 할 것 같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는데, 그린 와인은 달랐어요. 가볍게, 맥주처럼, 친구랑 잡담 나누듯 아무 때나 즐길 수 있는 술이었죠. 그래서 여행하는 내내 하루 한 잔, 많으면 한 병씩은 꼭 마셨던 것 같아요. 심지어 저녁에 숙소 근처 마트에 들러서 그냥 와인병 하나 집어 들고, 발코니에 앉아 치즈랑 올리브 몇 알과 같이 마신 날도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가장 신기한 건, 한국에 돌아와서도 자꾸 생각이 난다는 겁니다. 여행 중에 무심코 마셨던 그 가벼움이 집에서도 그리워지는 거죠. 그래서 가끔 포르투갈 와인 전문샵에 들르면 포트 와인은 거의 안 사고, 꼭 그린 와인만 집어 옵니다. 집 냉장고에 차갑게 식혀 두었다가 주말 저녁에 꺼내 마시면, 순간 다시 리스본 골목길을 걷는 기분이 들어요..
📌 요약 정보
- 이름: 비뉴 베르데(Vinho Verde), ‘그린 와인’이라는 뜻
- 종류: 화이트(대부분), 레드, 로제
- 알콜 도수: 보통 9~11% (가볍고 청량감 있음)
- 가격: 마트 기준 4~5유로, 레스토랑에서는 잔으로도 저렴하게 주문 가능
- 특징: 미세한 청량감, 상큼한 산미, 가볍게 즐기기 좋은 와인
- 추천 궁합: 해산물 요리, 치즈, 올리브, 가벼운 샐러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