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랑드르 미술: 자본의 탄생, 도시와 시장이 예술을 움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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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 미술: 자본의 탄생, 도시와 시장이 예술을 움직이다

by havanabrown 2025. 4. 21.

얼마 전 벨기에 브뤼헤를 여행했을 때 일이다. 그론닝게 미술관에서 얀 반 에이크의 작품을 보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15세기 그림인데 세부 묘사가 현대 사진보다 더 정밀했다. 성모 마리아가 읽고 있는 성경책의 글자 하나하나까지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도대체 왜 이 시대, 이 지역에서 이런 집착에 가까운 세밀함이 나타났을까?

 

세계 경제의 중심에서 꽃핀 예술

15세기 플랑드르는 오늘날 벨기에, 네덜란드 일대를 가리킨다. 당시 이곳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다. 브뤼헤, 헨트, 안트베르펜 같은 도시들은 북유럽 무역의 중심지였고, 이탈리아 상인들과 한자동맹 상인들이 만나는 교차점이었다.

재미있는 건 이 부가 교회나 왕실이 아닌 상인들의 손에 있었다는 점이다. 양모 무역으로 떼돈을 번 상인들, 은행업으로 부를 축적한 금융업자들, 원거리 무역으로 성공한 모험 상인들... 이들이 새로운 패트런(후원자)이 되었다.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그랬듯, 플랑드르의 부유한 시민들도 예술품 수집에 열을 올렸다. 다만 차이가 있었다. 이탈리아 귀족들이 거대한 프레스코화로 저택을 장식했다면, 플랑드르 상인들은 작고 정밀한 유화를 선호했다. 왜일까?

 

상인의 눈으로 보는 세상

플랑드르 상인들에게 디테일은 곧 돈이었다. 천의 품질을 가늠하려면 섬유 한 올 한 올을 살펴야 했고, 향신료의 진위를 판별하려면 색깔과 질감을 정확히 구분해야 했다. 이런 직업적 습관이 예술 취향으로 이어진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을 보자. 이 그림은 이탈리아 출신 상인 조반니 아르놀피니가 주문한 작품이다. 그림 속 모든 사물이 부의 증거다. 샹들리에, 거울, 오렌지, 모피 코트... 하나하나가 당시로선 엄청난 사치품이었다. 상인은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싶었고, 화가는 그 부를 눈속임이 아닌 정밀한 묘사로 증명했다.

더 흥미로운 건 이 그림이 일종의 계약서 역할을 했다는 설이다. 거울 속에 비친 두 증인, 벽에 적힌 "요하네스 데 에이크가 여기 있었다"는 서명... 상업 도시답게 예술작품마저 거래를 증명하는 문서가 된 셈이다.

 

시장이 만든 새로운 장르

플랑드르에서는 처음으로 '미술 시장'이라는 게 생겼다. 안트베르펜의 성 루카 길드 건물에서는 정기적으로 그림 경매가 열렸다. 화가들은 특정 고객의 주문을 받지 않고도 그림을 그렸다. 누군가는 사겠지, 하는 기대로.

이게 엄청난 변화였다. 그전까지 화가는 주문을 받아야만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기가 그리고 싶은 걸 그려서 시장에 내놓을 수 있게 됐다. 일종의 예술적 자유가 생긴 거다.

당연히 잘 팔리는 그림이 있었다. 정물화, 풍경화, 일상생활을 그린 장르화... 이런 세속적 주제들이 인기를 끌었다. 피테르 브뤼헐이 농민들의 결혼식이나 축제를 그린 것도, 잘 팔렸기 때문이다.

종교화도 변했다. 거창한 기적 장면보다는 소박한 일상 속 신앙이 그려졌다. 로베르트 캄팽의 <메로드 제단화>를 보면 수태고지가 평범한 플랑드르 중산층 가정에서 일어난다. 천사 가브리엘이 찾아온 곳은 천상이 아니라 깔끔한 응접실이다.

 

기술 혁신이 가져온 변화

플랑드르 화가들이 유화 기법을 완성시킨 것도 우연이 아니다. 유화는 템페라화와 달리 천천히 마른다. 수정이 가능하고, 얇게 여러 층을 쌓아 미묘한 색감을 낼 수 있다. 바쁜 상인들을 상대하려면 그림을 들고 이동해야 했는데, 나무판에 그린 유화는 벽화보다 훨씬 실용적이었다.

또 하나, 안경의 보급도 무시할 수 없다. 14세기부터 플랑드르에서는 안경 제작 기술이 발달했다. 나이 든 화가들도 세밀한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고, 구매자들도 디테일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그린 기괴하고 복잡한 지옥도는 돋보기 없이는 제대로 볼 수도 없을 정도다.

 

예술가의 지위 변화

플랑드르에서는 화가가 더 이상 단순한 장인이 아니었다. 얀 반 에이크는 부르고뉴 공작의 외교사절로 활동했고, 한스 멤링은 은행가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화가들도 사업가가 되었다. 대규모 공방을 운영하며 제자들을 고용했고, 작품을 대량생산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루벤스는 훗날 이 시스템을 극대화해서 거대한 '그림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미술품 거래를 전문으로 하는 중개상도 등장했다. 이들은 화가와 구매자를 연결하고 수수료를 받았다. 오늘날 갤러리스트의 원조인 셈이다.

 

돈이 예술을 타락시켰을까?

당시에도 비판은 있었다. 에라스무스 같은 인문주의자들은 플랑드르 미술이 지나치게 물질적이라고 지적했다. 영혼의 구원보다 현세의 부를 그리는 데 열중한다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세속성이 플랑드르 미술을 더 인간적으로 만들었다. 브뤼헐의 농민들, 베르메이르의 하녀들(베르메이르는 시대가 좀 뒤지만), 얀 반 에이크가 그린 상인의 아내들... 이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신화 속 영웅이나 성인이 아닌, 우리와 같은 사람들.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

브뤼헤의 운하를 걸으며 생각했다. 15세기 플랑드르와 21세기 한국이 닮은 점이 많다는 걸. 경제 발전이 문화 융성으로 이어지는 과정, 중산층이 문화 소비의 주체가 되는 현상, 예술의 상품화에 대한 우려...

다만 플랑드르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건 이거다. 자본과 예술의 만남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 때로는 그 긴장 관계가 새로운 창조의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

얀 반 에이크의 그림 속 상인 부부는 여전히 600년 전 그날의 옷을 입고 서 있다. 돈으로 산 영원이라고 냉소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그림에서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했던 인간의 보편적 욕망을 본다. 그리고 그 욕망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이토록 아름다운 작품들을 볼 수 없었을 거다.

얀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1434)
얀 반 에이크, 붉은 터번을 쓴 남자의 초상 (1433)